조선시대에도 보석제도가 있었다?

일정한 보증금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법원이 구속된 피고인을 석방시키는 제도를 보석이라고 한다. 보석으로 석방되어도 구속영장의 효력은 그대로 존속하고, 다만 그 집행이 정지된다는 점에서 구속의 취소와 구별되고, 일정한 보증금을 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구속의 집행정지와 다르다.

조선시대에도 죄인에 대한 보석제도가 있었을까? “태조 때 병을 얻은 유양이라는 사람을 병보석으로 풀어주어 정부 관리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며, 태종 때에는 사형수도 일종의 보석금인 속전(贖錢)을 받고 감형시켰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자 추운 겨울을 보낼 대책이 없어 죄인들을 석방해주기도 하였다.”라는 글이 민병덕 저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에 실려있다.


조선시대에도 변호사가 있었을까?

세종 5년(1423)에는 보석제도를 폐지하기도 했지만, 예외 규정을 두어 문무 관리와 음서 출신의 관리들은 ①국가에 대한 모반, ②임금에 대한 반역, ③반란의 도모, ④악역, ⑤도를 어긴 부도, ⑥임금이나 웃어른들을 공경하지 않는 대불경, ⑦부모에 대한 불효, ⑧형제나 친구간의 불화, ⑨의롭지 못한 불의, ⑩내란 등의 십악(十惡)을 저지른 경우와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였거나, 도둑이 훔친 물건을 받은 것 이외의 태형과 장형은 모두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세종 7년에 제정된 보석금에 대한 규정을 보면, 귀양이 3년 동안이면 동전 6,000꿰미와 저화 3,000장. 장600에 귀양 3,000리면 동전 9,000꿰미에 저화 4,500장을 보석금으로 내야 했다. 이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돈이있으면 벌을 면하고 돈이 없으면 벌을 받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다.

그리고 ‘보석’뿐만 아니라 ‘사면’조치도 있었다. 오늘날 국경일이나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사면·복권 조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옛날에도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죄인들을 석방하였다고 한다.

 세사람이 한 냥씩 손해보다 (三方一兩損)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재판
 명판결의 사례, 신응시의 판결